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레나다 침공 (문단 편집) == 작전명 '긴급 분노' == [[파일:external/www.latinamericanstudies.org/grenada-19.jpg|width=100%]] [[파일:History_Grenada_Announces_US_Invasion_Speech_SF_still_624x352.jpg|width=100%]] [[파일:external/www.latinamericanstudies.org/grenada-1.jpg|width=100%]] [[파일:external/therealrevo.com/grenada-20.jpg]] 사진의 상징은 [[제82공수사단]]의 부대마크다.[* 해석: 미국과 자유의 영웅인 캐리비언 동맹국들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 [youtube(HxevNld32gA)] 긴급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조셉 맥클리프와 [[노먼 슈워츠코프]]를 지휘관으로 한 7,300여명의 미군 병력을 필두로 OECS 회원국들의 353명의 병력이 그레나다에 투입되었다.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 [[제82공수사단]], 육군 [[제75레인저연대|레인저]]와 [[델타포스]], [[네이비 씰]],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 등이 선두로 그레나다에 공수, 상륙, 침투했고 이 뒤를 따라 보병연대와 공병대대가 상륙했다.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과 [[미합중국 공군|미 공군]]도 이를 지원했다. 당시 그레나다측은 정규군 1500여명과 722명의 쿠바군과 군사고문단, 소련, 북한, 동독, 불가리아, 리비아 등에서 지원하러 온 60여명의 군사고문단이 있었다. 이외에도 인도에서 온 200명, 중국에서 온 82명 정도가 더 있었다는 [[카더라]] 소문이 있다. 10월 24일 자정 [[제75레인저연대]] 1대대의 A중대와 B중대는 포인트 세리네스 공항을 점령하려고 [[C-130]] 수송기로 강습했다. 해당 공항은 [[소련군]]의 [[An-12]] 등의 수송기들이 착륙할 수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본래 수송기로 착륙하려 했으나 활주로가 폐쇄되었다는 것을 알고 급히 낙하산 강습으로 선회해야 했다.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던 것이 해당 공항에는 그레나다군의 대공포들과 [[BTR-60]] 장갑차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만일 착륙해서 강습작전을 펼쳤다면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강습에 성공한 레인저 대원들은 [[AC-130]]의 지원을 받아 [[M67 무반동포]]로 그레나다군의 대공포와 장갑차들을 제압하고 오전 10시 경 비행장을 완전히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비행장으로 카리브 연합군과 [[제82공수사단]] 병력, 미군 325보병 연대 병력들이 추가로 증원되었다. 오후 3시 30분 경 그레나다군 BTR-60 장갑차 세 대가 공항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가했지만 미군의 무반동포와 AC-130에 의해 전부 격파되어 버렸다. 레인저 병력들이 세리네스 공항을 강습하던 동시간에 SEAL 4팀은 그레나다군 순찰선 몰래 펄스 공항 인근 해변에 상륙했고 해당 해변이 강습에 부적합하다는 정보를 습득했다. 10월 25일 새벽 5시 30분 경 미 해병대 8연대 2대대 병력들은 [[CH-46]]과 [[CH-53]] 헬기들에 탑승한 채로 펄스 공항에 강습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레나다군은 [[DShK]] 중기관총으로 저항했지만 [[AH-1]] 공격헬기의 공격에 격파되어 버렸다. 한편, 10월 25일 새벽 '그레나다 자유라디오' 방송국(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원격송신탑이었다) 확보 임무를 맡은 SEAL 6팀 대원들이 미 육군의 [[UH-60 블랙 호크]] 헬리콥터로 침투하여 방송국을 점령했다. 본래는 구출한 폴 스쿤 총독을 방송국으로 데리고 와서 그레나다 군에 대한 선전 방송을 할 의도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스쿤 총독 구출 작전 자체도 굉장히 힘들어진 판에다, 방송국 점령 팀은 겨우 1개 소대(SEAL 팀 1개 소대의 정원은 14명)에 불과해서 [[BTR#s-5|BTR-60]] 장갑차를 동원한 그레나다군의 반격을 받고 결국 방송 장비를 파괴한 후 황급히 정글로 퇴출했다. 그 와중에도 전사자는 1명도 없었다. [[델타 포스]] 병력들과 [[제75레인저연대]] C중대 병력들은 [[UH-60]] 헬리콥터와 [[AH-6]] 헬리콥터를 동원해 힐 교도소에 수감된 그레나다 정치범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레나다군 대공포에 MH-60 헬리콥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한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SEAL은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 구출과 통신기지 파괴 등의 특수작전을 실행했다. 임무 자체는 모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삽질들이 있었다. 작전이 개시되기 전인 23일 'SEAL 6팀' 중 1개 팀과 공군 공정관제사([[CCT]])는 1차 침투 당시 그냥 구축함에서 보트로 옮겨타고 상륙해도 되는데 굳이 해상 공수강하를 하다가 폭풍우 속 높은 파도에 SEAL 6팀 대원 4명이 익사했고 생존한 대원들이 작전을 지속하려 했으나 침투용 보트가 파도에 휩쓸려 버려서 결국 임무 자체가 취소되었다. 다른 팀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작전 첫 날인 25일 총독 관저에 헬리콥터로 침투하던 SEAL 팀은 그레나다군의 대공포 사격으로 혼란이 생겨 위성통신 장비인 SATCOM을 헬리콥터에 두고 내렸다. 장갑차를 동원한 그레나다군에 포위되어 교전하던 SEAL 팀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근접항공지원에 의지하며 24시간 동안 고립되어 있었는데 일반 무전기도 금세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SEAL 팀을 지원하던 미 공군의 [[AC-130]] 건쉽과 교신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한 대원이 혹시나 하고 관저의 일반 전화로 통신을 시도해 봤는데 대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일반 전화망은 살아 있었다. 그레나다군이 깜빡하고 총독 관저의 전화선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국제전화는 유료인지라 교환원이 그 와중에도 '''"결제는 뭘로 하실래요?"'''라고 물었고 대원의 개인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미국 포트 브래그에 있는 [[미합중국 합동특수작전사령부|합동특수전사령부(JSOC)]]와의 통화에 성공하여 통화 중계를 통해 관저 상공의 AC-130 항공기와 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영화 [[트랜스포머(영화)|트랜스포머]] 1편에서 패러디되었다. 물론 배경은 다르지만 상황이 거의 일치한다.] 이 와중에 지원나온 미 해병대의 AH-1T 시 코브라 공격 헬리콥터 2대와 미 육군의 [[UH-60 블랙 호크]] 헬리콥터 1대가 그레나다군의 [[ZU-23|ZU-23-2]]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자 중 5명이 전사했다. 이외에도 미 해병대의 [[AAV-7A1]] 상륙장갑차들과 [[M60 패튼]] 전차 4대가 상륙해서 해당 작전을 지원했는데 전차가 한 대도 없던 그레나다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BTR-60]] 장갑차 한 대가 미군의 전차에 의해 격파당하고 프레드릭 항구도 점령당했다.[* 이때 미군 전차들은 105mm탄을 보급받지 못하고 오직 훈련용 탄과 기관총에 의지한 채로 상륙하였다. Marines Under Armour의 저자이자 미해병 대령 예비역인 Kenneth W. Estes에 의하면 훈련용 탄이라고 할지어도 APC 장갑 정도는 충분히 관통시킬 수 있었다고.] 이외에도 미군의 삽질이 계속되었는데 국가안전보장국([[NSA]])에조차 정보요구를 하지 않아서 때때로 1895년에 작성된 지도나 '''상업용 관광지도로''' 작업하는 등 내부적 정보교환이 원활하지 않은 그야말로 비밀 작전이었기 때문에 해군 [[A-7]] 전폭기는 애꿎은 [[정신병원]]을 박살내 환자 18명이 사망했다. 침공 둘쨋 날인 10월 26일 아침 [[쿠바군]]은 미군 325보병 연대 2대대의 순찰대를 매복공격했고 미군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미군은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쿠바군의 주요 주둔지를 포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미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 쿠바군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결국 오전 8시 30분에 항복하게 되었다. 쿠바군의 항복 이후 미군은 쿠바군의 막대한 무기가 저장된 무기고를 접수할 수 있게 되었다. 오후에는 [[제75레인저연대]] 2대대 병력들이 [[CH-46]], [[CH-53]] 헬리콥터에 탑승한 채로 미국인 학생들이 구금된 그랜드 안네스 대학 캠퍼스에 강습했다. 그레나다 경찰들이 저항하는 바람에 레인저 대원 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 CH-46 한 대는 야자수에 부딪혀 추락해 비전투 손실이 발생되었다. 결국 성공적으로 대학을 접수한 뒤 미국인 대학생 233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파일:external/usercontent2.hubimg.com/5536595_f520.jpg|width=100%]] 10월 27일, 침공 3일째가 되자 그레나다군의 저항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레나다군 BTR 한 대가 추가적으로 해병대의 [[M72 LAW]] 사수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미국인 대학생 200명에 대한 구출작전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미군의 실수가 이어졌는데 미군 해병대는 인근 '''미군 육군 지휘소를 [[A-7]] 전폭기의 공습 표적으로 지목하여 병사 17명 부상, 1명 사망이라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UH-60]]이 강습하던 도중 충돌이 발생해 추락해 3명의 사망자와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SEAL 대원 16명은 비바람 속에 바다로 낙하하여 4명이 사망하였다. 이렇듯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그레나다군은 미군에 항복했고 그렇게 미군은 그레나다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찾았다. 계속된 전투에서 미군은 19명이 전사[* 그 중 17명은 정보 부족으로 인한 아군의 오발 및 사고로 사망했다.], 120명이 부상당했고 그레나다 측은 병사 45명이 전사, 민간인 24명이 사망하고 358여명의 병사가 부상당했다. 파견된 쿠바군도 24명이 전사하고 59명이 부상당했으며 638명은 미국의 포로가 되었다. 양측이 동원한 병력을 모두 합쳐도 9천명도 채 되지 않고 원래 군 특성상 전체 병력에서 전투병의 비중은 아무리 많아도 3분의 1 가량인 데다 대규모 포격 및 폭격도 없었으며 미군 한정으로 의무후송이 발전한 시기의 전쟁에 이 정도 피해라면 양측 모두 실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의미이다. 실제 한 레인저 참전군인은 '진흙탕 싸움'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미군의 사상자는 실질적으로 오발 및 사고사를 제외하고 전사 2명이었는데 어찌됐건 보병 전투라고 해도 조직력이건 화력이건 압도적인 건 미군이고 방탄 장구류도 갖추고 있었으며 부상자 구호가 신속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총탄을 맞아도 머리나 심장 등 급소에 직격으로 맞는 게 아니면 생존하는 사례가 많았다. 게다가 미군은 든든한 화력지원도 받고 있었지만 그레나다와 쿠바 측은 그냥 맨몸으로 싸우는 처지였다. 심하게 말하면 후일 미군과 맞서는 이라크 반군이나 탈레반보다도 무장이 부실한 상태였으니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UN에서는 침공 개시 직후인 10월 25일부터 28일에 걸쳐 긴급하게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가이아나, [[니카라과]]의 공동안을 채택했지만 미국은 거부권을 발동하고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공동안은 부결되어 11월 2일 UN 총회 심의에 부쳐졌다. 안건은 찬성 108표, 반대 9표, 기권 27표로 가이아나와 니카라과의 공동 결의안에 벨기에의 수정안이 더해져 가결되었다. 이 수정안은 군사간섭의 국제법 위반 우려, 그레나다의 주권 보호, 외국군의 즉시 철수 등이 주요 안건이었는데 미국과 카리브 동맹군은 이 결의안에 응하지 않고 평화유지군이라고 이름만 바꿔 치안 유지, 계속된 전쟁에 나서면서 결과적으로는 UN 결의안을 따르지 않았다. 미주기구에서는 침공 다음날인 10월 26일에 이사회 특별 회담이 소집되어 31개 가맹국 중 쿠바, 수리남이 불참한 가운데 15개국이 침공을 비난했고 11개국이 침공을 지지하며 의견이 나누어졌기에 표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회담이 종료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머나먼 카리브 해의 섬나라인 그레나다와는 외교적인 접점도 딱히 없었고 UN 가입국도 아니었으므로 명목상으로도 그레나다 침공과는 무관했으나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당연히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을 외무부(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10월 26일 발표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02600329201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10-26&officeId=00032&pageNo=1&printNo=11716&publishType=00020|'外務部(외무부) 성명 그레나다 安保(안보)조치 平和(평화)·질서에 不可避(불가피)' 경향신문 1983년10월 26일 기사]] 12월 15일, 그레나다 전역이 미군과 카리브 동맹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쿠바군 포로들과 각국의 군사고문단은 연금되었다가 모두 추방되었다. 그레나다로 온 쿠바 노동자들 역시 추방되었다. 이후 미군의 주력 전투병력은 철수했지만 미군과 OECS 동맹군에 의하여 평화유지군이 새로이 설립되어 [[그레나다]]의 평화유지를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